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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글

불온선전물, 일명 '삐라'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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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한장에 공책 한권'. 삐라는 저희 아버지 어린시절 추억의 물건입니다. 공책을 얻기 위해 하루종일 삐라를 주웠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모아서 경찰아저씨에게 오해받기도 했었다지요.

삐라는 일본말로 불온 선전물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전에는 북한에서도 삐라라는 말을 사용한다는데 '전단'을 삐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삐라에 나타나있는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문구와 그림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시대상을 반영하는 추억의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삐라를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내가 군생활하던 90년대 말까지만해도 전방부대에서는 가끔 접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북으로 보내는 삐라도 있었죠.


한 번은 비가 억세게 내린 후의 어느 여름날 북에서 내려온 부유물을 확인하기 위해 한탄강 수문으로 내려갔는데 봉지에 싸여 있는 물건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탐지기가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폭발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물건을 건져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서 약간의 쌀과 과자 등 먹을 것과 심리전단이 들어있었습니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결과 우리 측에서 북으로 풍선을 통해 날려 보낸 것으로 강으로 떨어져 다시 우리 측으로 떠내려 온 것으로 확인됐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구나. 북한에서만 뿌리는 줄 알았는데.'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우리도 삐라를 보낸다는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대본부에서 근무하다보니 중대급에서 보고되는 북한 삐라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빳빳한 종이에 사진이 곁들어진 칼라풀한 삐라도 있었고, 노란종이에 흑백으로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진 단순한 삐라 등 다양한 형태의 삐라를 접해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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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도 여러 형태의 삐라를 보면서 가끔은 삐라를 줍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만 해도 반공교육을 중요시하던 시기라 반공교육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복을 내세워 이승복 추모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표어 포스터 대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공교육을 했습니다. 심지어 수학여행 코스에도 강원도 평창에 있는 이승복 기념관이 꼭 포함될 만큼 반공교육을 중요시했었죠. 특히나 북한이 이러한 반공교육을 방해하고 심리전을 펼치기 위해 우리나라로 보낸 삐라는 그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공책과 연필을 받기 위한 어린이들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반공의식만 더욱 고취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한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삐라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비하하고 미국을 마치 민족해방을 저해하는 악마로 표현하는 글과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으며, 북에서 뿌린 삐라의 양도 엄청나 바람을 타고 날아와 마을 여기저기에 많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학교나 관할 경찰서에서는 학생들에게 공책을 미끼(?)로 삐라 한 장당 공책 한권씩의 대가를 제공해 주기도 했었습니다.


주검과 삶 운명은 그대 손에 있다! 남한에서 북한군에게 뿌린 삐라.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줄 알고 그 종이를 주워들었는데 자세하게 내용을 살펴보니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세력을 비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연합군이 뿌린 삐라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뿌린 삐라로 심리전술용이다.

반공이 국시였고, 학교 미술 시간이면 북한군을 괴뢰군이라 하여 뿔 달린 도깨비를 그렸고 뿔은 하나를 그릴 때도 있고 두 개를 그릴 때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그릴 때면 얼굴은 없고 엄청나게 큰 혹만 그렸었죠.. 아직도 김일성을 그리라고 하면 혹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깨비 뿔이나 혹만 그리면 끝나는 반공 포스터는 그림에 소질이 없던 내게도 세상 어느 그림보다 그리기 쉬운 그림이었습니다. 도깨비 그림을 그린 것은 중학교 시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되는 크레용은 '빨강'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빨강 크레용 하나로만 그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하기도 했었죠.

유독 빨강 크레용이 많이 쓰이던 시절, 세상에는 '간첩'이라는 말과 '무장공비'라는 말이 저의 어린 동심을 두려움에 떨게 했었습니다. 동시에 마을에 사는 누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면 그사람은 어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누웠었죠.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갈 나이즈음 삐라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삐라에 적힌 내용만 읽어도 세상의 관심이 어떤 곳에 있는지, 북한이 남한 사회에 어떻게 간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월북한 군인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대동강변을 거니는 사진과 함께 '월북하면 사병급은 1억원이 넘고 장성급은 최소 3억원이 넘는다'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북한 삐라나, 귀순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진을 실은 남한 삐라나 그 수준은 돗진갯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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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한 장이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항공기에서 살포한 삐라에 'safe conduct pass'와 '안전보장증명서'라는 문구가 들어 있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뿌려진 삐라를 들고 투항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그 당시의 상황은 심리전에서의 성공이 곧 작전의 성공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선택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인가.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이다.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 투항하면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안전보장증서이다.

정치적인 삐라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5공 세력이 되살아난다'라는 카툰도 있습니다.


5공 세력이 되살아난다 노태우 정권이 5공 세력의 부활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는 그림으로 북한이 뿌린 삐라이다.

전쟁과 이념 대결의 장에서 사용되었던 삐라였지만 요즘은 좀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삐라를신고하면 학용품을 주던 불온선전물 처리 규칙이 2007년 10월에 폐지되었기 때문이죠. 이젠기념품으로 한 장씩 보관한다고 해도 겁나지 않을 세상이 되었습니다.

40대를 넘긴 사람치고 한 번쯤 삐라를 주워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주운 삐라를 들고 파출소로 달려가던가 아니면 그것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던 일은 이제 우리의 아픈 추억이 되었다. 분단된 우리 민족이 겪어온 서러운 '내용증명'이 추억의 박물관에서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을 기다립니다.